[이슈프리즘] 금융질서 근간이 흔들린다

입력 2024-01-23 17:57   수정 2024-01-24 00:12

신용은 금융거래의 근간이다. 신용에는 ‘반드시 갚겠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이를 기반으로 신용점수가 산정되고 대출 한도와 금리 등도 결정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신용을 통한 모든 금융거래에 제약이 따른다.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금융거래의 기반을 흔드는 조치가 잇따르고 있다. 당정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취약계층의 대출 연체 기록을 없애주는 ‘신용사면’을 하기로 했다. 대상은 2021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2000만원 이하 연체자 중 5월까지 빚을 모두 갚는 사람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영업이 어려워 금융회사에서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신용도가 떨어진 이들이 대출 등에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한다는 취지다.

금융권은 통상 100만원이 넘는 금액을 3개월 이상 연체하면 신용불량자로 분류한다. 신용정보원은 최장 1년간 연체 기록을 보존하고, 금융사와 신용평가사는 이를 공유해 최장 5년까지 활용한다. 이 때문에 빚을 갚았더라도 이 정보에 따라 추가 대출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데 불이익을 당한다.

신용사면으로 2000만원 이하 연체자 250만 명의 신용점수가 올라 대환 대출 등을 통해 저금리 대출로 갈아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15만 명은 신용점수 상승으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게 된다. 25만 명은 은행권 신규 대출자 평균 신용점수를 넘어 은행에서 대출받기가 한결 수월해진다. 모두 290만 명이 혜택을 받는 것이다.

앞서 은행들은 윤석열 대통령의 ‘종노릇’ 비판과 더불어민주당의 ‘횡재세’ 법제화 압박 등으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상생금융’ 방안을 내놨다. 187만 명을 대상으로 금리가 연 5%를 초과하는 대출에 대해 최대 150만원의 이자를 돌려주는 게 핵심이다. 18개 은행이 참여해 모두 2조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제2금융권도 자영업자를 위한 3000억원 규모의 이자 캐시백에 나선다.

이전에도 전국 단위 선거가 있을 때마다 비슷한 정책이 쏟아졌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김대중 정부를 시작으로 이명박 정부는 ‘260만 명 신용사면’, 박근혜 정부는 ‘322만 명 빚 탕감’을 약속했다. 문재인 정부도 2021년 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신용사면을 단행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게 초점을 맞춘 이런 조치는 결국 총선을 겨냥한 선심성 공약이란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이자를 깎아주고 연체 기록을 지워주는 일이 반복되면 금융산업의 근간인 신용평가시스템이 흔들리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금융회사들이 우량 대출자와 부실 대출자를 구분할 기준이 없어진다는 것도 문제다. 결국 금융회사는 전체 대출금리를 높이고, 한도는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게 된다. 형평성 논란도 불가피하다. 힘들어도 꼬박꼬박 빚을 갚은 사람들은 역차별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과거 구제 대상자 중 20%가 다시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점을 감안하면 정책 효과에도 의문이 제기된다.

연체 기록이 없어진 자영업자들이 다시 대출을 받기 위해 몰릴 경우 1052조6000억원까지 불어난 자영업자 대출 규모가 급증할 우려도 있다. 전체 금융권 자영업자 대출의 연체율은 2021년 말 0.69%에서 작년 9월 말 1.24%로 치솟는 등 빚의 질도 계속 악화하고 있다. 지금은 자영업자 대출 관리의 고삐를 풀 게 아니라 오히려 단단히 조여야 할 때다. 이들 조치가 총선이 끝난 뒤 실행에 옮겨질지도 불투명하다. 여야는 선거용 공약 대신 경기를 회복시켜 자영업자들의 소득을 늘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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